
한고조 유방은 중국의 제왕 중에서도 독특한 기질이 있다.
그 기질은 유방에게 독특한 인간적 매력을 발산하도록 만들었고,
마침내 초한쟁패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였다.
평민 출신의 유방
평민 출신이였고, 중년의 나이까지 별볼 일이 없었다.
패현 풍읍 중양리의 유씨 집안 막내아들로 나이 40 즈음에 사수정의 정장을 하고 있었다.
하릴없이 이웃동네와 말썽을 일으키며, 그야말로 대중적인 삶을 살았다.
한고조 유방과 함께 거병했었던 패현 출신의 동지들을 보면 남다른 인간미가 있다.
노관, 번쾌, 소하, 조참, 주발, 하후영 등.. 왕릉이나 옹치도 고향에서 함께 어울리며 성장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대의大義란 거창한 것이지만, 나름대로의 로만스가 있었다.
패거리를 이루고, 꾀를 내어 이익을 도모하는 일에 능숙하였고, 이기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명분을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귀족 출신인 항우項羽와는 다른 호연지기가 있었다.
항우는 초나라 장군 항연의 손자이다. 항연은 마지막까지 진나라에 저항하며 싸우다 전사한 인물이다.
항우는 숙부 항량에게서 성장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가문 내력의 영향으로, 진나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고, 다른 분야보다는 전쟁에서 이기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글과 검술보다는, 만인萬人을 싸워 이기는 전쟁기술 병법을 배우고자 하였다.
진시황 순행길 사건
진시황이 자신이 통일한 제국을 살피기 위해 전국을 순행할 때, 어마어마한 순행단을 이끌고 다녔다.
순행단이 마을이나 도시를 가로질러 갈 때면 많은 이들이 납작 엎드리면서도 구경을 나왔는데,
항우도, 유방도 진시황의 순행 행렬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항우는 조국 楚초나라의 원수 진시황을 보고 이를 갈며 언젠간 저 자리를 빼앗아 차지하겠다고 분을 토했고,
유방은 으리으리한 행렬을 보고 장부라면 저런 행렬을 이끌어볼만하다며 감탄을 내뱉었다고 한다.
유방의 대범함을 옅볼 수 있는 대목이다.
광무廣武 대치
秦진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연합군이 관중으로 진격했을 때, 항우는 진나라의 주력부대인 장한의 군대를 격파하기 위해 조나라의 거록으로 향했고, 유방은 누구보다 빨리 관중에 도착하기 위해 남쪽길로 돌아 무관으로 진격했다.
진왕 자영의 항복을 받은 유방은 초회왕이 공언한대로 관중왕이 될뻔하였지만, 화가 난 상태로 곧 도착한 항우에게 싹싹 빌고 관중을 양보한다.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하였지만, 그는 시황제가 만든 새로운 시대를 이어가지 않고, 전국통일 이전으로 회귀하는 반동적인 질서를 만든다.
자신이 이른바 서초패왕이 되어 패자覇者 노릇을 하지만, 전국 각지에 왕들을 분봉하는 것이였다.
관중을 먼저 먹은 사건으로 위험인물로 찍혀버린 유방은 벽지 중의 벽지 파촉에 漢한왕으로 분봉받게 된다.
중원의 동쪽 초나라 패현(오늘날의 서주徐州) 출신이 정반대편의 산골짜기로 잔도를 타고 들어가는 기분은 어떠할까.
안그래도 불귀의 객이 될 수 있는 길인데다가, 장량은 항우의 경계를 풀기 위해 잔도까지 태우라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파촉은 유방이 항우의 견제를 받지 않고 힘을 기를 수 있는 천혜의 보금자리였다.
이미 진나라 때부터 도강언都江堰이라는 엄청난 수리 시설이 있었다.
가히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고 할만큼 물산이 풍부했다.
유방은 힘을 기른 후 대장군 한신을 앞세워 명수잔도 암도진창으로 항우가 방패막이로 세운 삼진(옹왕 장한, 새왕 사마흔, 적왕 동예)를 뚫고 관중을 먹었다.
초한쟁패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이후 여러차례의 대회전이 있었으나, 큰 전투에서 유방은 번번히 패배했다.
그렇지만 유방은 각지의 제후들을 포섭하여 항우를 포위해가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유리한 형세를 굳혀갔다.
그러던 중 이른바 광무산 골짜기에서 양군이 수개월 동안 지루한 대치전을 벌이게 되는데,
서로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쌍욕을 퍼부으며 기싸움만 할뿐 전면전은 벌어지지 않았고,
당시 북쪽의 齊제나라에서 한신이 초나라의 용저 군대를 격파하고, 항우의 후방에서는 팽월이 보급로를 노획하는 등,
항우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정정당당한 대결을 원하던 항우답지 않게, 몰래 매우 강력한 쇠뇌를 숨켜두었다가, 유방이 욕을 하러 나오면 쏘아 죽이기로 작전을 획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어김없이 유방이 망루에 올라 신나게 쌍욕을 퍼붓자, 항우는 숨켜두었던 강노를 쏘아 유방을 명중시키는데..
화살을 가슴팍에 정통으로 맞은 유방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자빠질 법도 했지만,
역시 제왕 중의 제왕은 달랐다.
자신을 따르는 군단이 뒤에서 모두 지켜보고 있는데, 까불면서 쌍욕을 내뱉다가 화살을 맞고 죽은 모습을 보인다면, 군의 사기가 어떻게 될 것인가?
漢한군은 공황상태에 빠질 것이고, 적의 왕을 쏘아죽인 楚초군은 때를 놓치지 않고 덮쳐서 짓밟을 것이다.
유방은 안간힘을 써서 일어나 생살이 떼어져나가는 아픔을 참고 화살을 뽑아들고 흔들며 소리쳤다.
“항우 이 못난 것아, 네가 쏜 화살은 내 발가락에 맞았다 이놈아!”
모든 기력을 쏟아 자신의 건재함을 허풍 떨은 유방은 부축을 받으며 막사로 돌아갔고, 이후 생사를 넘나드는 지경에서 치료를 받게 된다.
자신이 혼신의 힘뿐만 아니라 모든 자존심까지 걸며 쏜 화살이 유방의 가슴이 아닌 발가락에 맞았다고 조롱을 받은 항우는 더욱 기가 꺾이게 되고, 유방과의 전의를 더욱 상실하게 되었을 것이다.
항우와 유방의 초한쟁패.
그 승패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겠으나,
승리를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유방처럼 허풍을 떨 수 있는 대범한 기질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낙천적인 유방 패거리의 긍지
이러한 기질은 유방뿐 아니라 유방과 함께했던 패현 출신의 패거리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기질이었다.
패현에서 거병한 그날부터, 유방의 패거리는 끊임없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내란과 배신도 있었고, 파촉으로 쫓겨들어가는 절망도 있었으며,
항우와의 전투에서 쫓겨 죽을뻔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늘 다시 일어섰으며, 용기를 가지고 전장에 앞장서서 싸웠다.
이들 대부분은 평민 출신으로 유방과 같이 별볼일 없었고,
힘들었던 시절에는 고되고 비루한 생업으로 억척같이 살던 자들이였다.
까짓거 다시 고생길이 열린다한들, 그저 또 다시 버티면 그만이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유방은 삼척장검으로 일어난 자신의 일생을 후회없이 살았다.
포의를 입고 그 위업을 달성하였는데, 앞으로 더 해내지 못할 일이 또 무엇인가?
자신감을 너머 앞뒤 재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긍지가 있었다.
이러한 기질의 유방이 중심에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유방의 패거리도 그 영향을 받아 함께하게 되었다.
낙천성과 그로부터 비롯된 긍지는 유방의 대범함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